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슐리펜 계획 (문단 편집) == 결과 == ||[[파일:970432311_tp.jpg|width=100%]]||[[파일:970432315_tp.jpg|width=100%]]|| ||<-2> ▲ 이 [[회중시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보겐호프(Otto von Bogenhoff) 장군에게 수여한 IWC 회중시계다. 시계 케이스에 적혀있는 [[독일어]]는 'FELDZUG GEG FRANKREICH RUSSLAND ENGLAND usw'로 FELDZUG는 [[전역(동음이의어)#戰役|전역]]이란 뜻이고, GEG는 ~에 대하여란 뜻이며, FRANKREICH RUSSLAND ENGLAND는 각각 프랑스, 러시아, 영국. usw[* Und so weiter의 준말. '운트 조 바이터' 정도로 발음한다.]는 라틴어의 etc. 와 같은 뜻으로, 기타 등등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프랑스, 러시아, 영국, 기타 등등 전역이란 얘기인데, 당시 독일은 말 그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 계획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을 무시한 결과 슐리펜 계획은 1차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반기에는 슐리펜이 프랑스의 가장 하책이라고 여긴 '''알자스 진공'''을 프랑스군이 기꺼이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였으나, 벨기에의 저항으로 이레 가까이 전선이 벨기에 방면에 묶였고, [[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버텨보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의 작전[* 이미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이전.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똑같이 해보려다가 끝내 길을 멈추고 비시에서 [[나치 독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을 프랑스군 소장파와 노장 조제프 갈리에니가 [[마른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독일 제국]]의 전략적 목표 좌절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냈다. 끝내 이 싸움에서 측면을 찔린 독일 제국군이 안정적인 고지대를 선점하러 전선을 조금 물리면서, 서부 전선은 [[북해]] 연안에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가 나왔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어떤 뜻에서 보자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쪽으로만 급속 진군한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야말로 슐리펜 계획의 진정한 형태였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알자스-로렌]] 방면은 [[라인 강]]과 보주[* 도이칠란트어로는 vogesen(포게젠)]산맥 및 고지대를 지나야만 하니, 신속하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저지대 지역인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신속하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려면 역시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하며, 실제로 [[1913년]]의 프랑스군 총참모장은 독일 제국과의 전쟁 시 벨기에를 통과해서 독일 영토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총리에게 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설정한 돌파경로는 보편타당한 셈. 그러나 이건 프랑스 입장에서나 그럴 듯한 이야기지 예정에도 없는 [[양면전쟁]]을 벌여서 시간에 쫓기는 독일 제국에게는 울며 겨자먹는 [[도박]]일 뿐이다. 1차대전과 슐리펜 계획은 전쟁에서의 철도의 역할을 보여줬지만 그 한계 또한 같이 드러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철도를 이용해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했고, 그 부대를 유지할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철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철도 종단점은 전투부대를 따라가기엔 너무 경직되었으며[* 독일은 벨기에의 철도가 조직적으로나(후퇴하는 벨기에군의 파괴공작) 비조직적으로나(사보타주) 파괴될 것을 예견하여, 철도를 신속히 복구하기 위한 인원, 장비 등을 보유한 철도중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철도의 복구 속도가 파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투부대는 철도 종단점과 한참 떨어져서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철도 종단점과 전투부대 사이를 이어줄 수송부대는 전쟁 초기의 병력동원 시점에서부터 전투부대와 떨어져버렸다.[* 이는 최대한 빠른 병력소집을 위해, 병력동원 시기에서의 철도사용 최우선권을 전투부대에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철도역에는 피복과 탄약이 굴러다니고 [[전투식량]]이 썩어가고 있었지만, 전선에 도달하는 양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당시에도 구데리안이 화물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가 있던 만큼[* 이 말을 들은 군수장교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럼 밀가루는 누가 옮겨?"''']화물차는 있었지만 차량조차도 최신문물로 취급받을 정도로 대중화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고 현가장치들도 기술적 개념 제시는 몰라도 실용화는 저조한 상태였다. 이렇기 때문에 보급전의 역사로 유명한 마르틴 반 크레펠트는 이를 넘어서 슐리펜 작전 원안은 보급계획이 관념적 수준이었으며 오히려 사실성 있게 재편한 것이 소몰트케의 조정안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넘어서 테렌스 쥐베르는 슐리펜 계획은 그저 독일의 전쟁계획이 1차대전을 일으켰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독일의 정신승리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 물론 이런 주장은 테렌스 홈즈나 로버트 홀리같은 학자들에게 반박당한다. 세계대전사로 유명한 [[존 키건]]은 슐리펜 계획은 현실적이고 수학적, 지리적 현실을 반영한 작전이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인프라를 이용하기까지 비포장도로 수백km를 자력으로 이동해야 하고 독일군이 프랑스와 벨기에의 변경에 설치된 인프라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해당지역의 빈약한 인프라로는 파리 점령에 필요한 병력을 착실히 전개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가망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